가버나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에스프레소 같은 영화/ 악인의 탄생, 줄거리 강스포


영화 가버나움은 상영시간 내내 먹먹함이 마음을 날카롭게 베어나갑니다. 먹먹함. 막막함. 절망감. 좌절. 도망칠 곳 없는 사방이 막힌채 침몰하는 배 최하층에 타있는 것 같은 숨막힘이 영화 내내 관객들의 목을 조여옵니다. 


저도 극장 의자에 앉아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공항장애의 재발을 겪었습니다. 제가 겪었던 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화의 이야기. 연민과 무관심, 그 중간 어딘가에 관객들을 던지고는 무책임하게 막을 닫아버리는 영화,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으로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로부터 멸망의 예언을 들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지옥을 묘사할 때 종종 쓰이는 명사죠. 


영화는 레바논의 베이루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로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하는 현실은 그 베이루트의 밑자락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밑자락에서도 지면에 한없이 이들의 삶을 보여주죠. 그 한복판에 12살(로 추정되는) 소년 자인이 등장합니다.



영화는 법정에서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는 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외로 이 장면은 맥거핀처럼 사용되죠. 예고편만 보면 이후 법정드라마처럼 흘러갈 것 처럼 분위기를 잡지만, 이 장면 이후 고소 이야기는 쏙 들어갑니다. 가버나움의 반전 중 하나랄까요... 



법정씬에서 관객은 자인이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것과 그로인해 5년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관객들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하나 던지죠. 


왜 저 잘생기고 속눈썹 긴 소년은 범죄자가 되었나, 왜 악행을 저질렀나, 왜 악인이 되고 말았나. 

(개인적으로 자인역의 자인 알 라피아가 너무 잘생겨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의 분위기와 좀 겉도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종종 하이앵글로 거리를 묘사합니다. 이런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상황을 내려다보게 만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튜버 라이너의 표현처럼, 영화는 관객을 여행온 관광객의 위치에 놓고 영화를 진행하죠. 하지만 인물을 묘사할 때는 그 인물 깊숙히 들어가 극을 진행합니다. 


심도가 극도로 얕은 촬영으로 인물을 묘사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럴때면 관객들은 그 인물의 어깨너머로만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등장인물들의 막막함에 동참하게 되죠.



가버나움의 미덕 중 하나는 관객을 영화의 관찰자 혹은 동참자 둘 중 하나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황폐한 거리를 뛰어노는 아이들을 묘사할때는 부감과 지나치는 시선같은 핸드헬드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죠. 


그러다 자인이 라힐을 만날 때는 밤거리의 조명이 후광처럼 라힐 뒤를 비추고, 그런 라힐을 보는 자인의 시선으로 화면을 그려내며 등장인물 깊숙히 관객들을 데려갑니다. 


관찰자가 되어 느껴지는 연민과, 그 인물이 되어 느껴지는 절망감, 두가지 감정이 신호등의 붉은등, 파란등 교차하듯 교차하며 관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합니다. 감수성의 강약을 계단 삼아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그런 강약조절에 관객들은 이탈없이 영화의 마지막을 목격할 수 있게되죠.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의아할 수 있지만, 레바논의 2017년 1인당 GDP는 8500달러 수준으로, 지상위의 지옥으로 묘사하기에는 너무 잘사는 국가입니다. (같은 시기 이집트는 2400달러, 시리아는 2000달러의 1인당 GDP를 보여줍니다.) 


레바논 내전도 1990년 대에 끝이 났죠. 게다가 베이루트는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관광도시로 중동의 파리였던 곳이 아니라 지금도 중동의 대표적인 관광도시 중 한곳입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이 이 영화의 비극을 더 심화 시킵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림자 진 삶에서 한걸음만 나가면 지중해의 풍경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니까요. 빛이 세면 그림자가 더 짙어지죠. 영화가 그리는 레바논 뒷골목의 삶이 그렇습니다.



영화 내내 자인은 무언가를 빼앗깁니다. 동생을 빼앗기고, 간신히 구성된 유사가족을 빼앗기고, 힘들게 모은 돈을 빼앗기고, 동생같이 돌보던 아기를 빼앗기고 마지막으로는 비범죄인의 신분도 빼앗기죠.



그런데 이런 자인도 사실은 빼앗을때가 있습니다. 동네 꼬마들이 가지고 놀던 스케이트 보드를 훔치는 장면에서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자인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빼앗기기만 했던 것은 자인이 선해서인가? 자인도 빼앗을 환경이 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빼앗을 사람아닌가?



가버나움에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절망같은 현실을 만든 사람의 얼굴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습니다.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시작할 때 세상을 망친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죠. 그런데 왠만한 아포칼립스 영화보다 더 황폐해진 가버나움의 현실은 시작도 없이 시작합니다.


자인이 고소하는 자인의 부모들. 그들은 악인일까요? 영화 초반에 그들은 나쁜 부모처럼 묘사됩니다. 자인의 부모는 아이를 시켜 진통제를 사오게 하고 그걸로 불법약물을 만들어 교도소에 판매합니다. 그 집의 신생아는 짐승처럼 발이 묶여있죠. 게다가 자인의 동생 사하르는 닭 몇마리에 매매혼 당합니다. 



나쁜 부모죠. 아이들을 방치하고 닭 몇마리에 팔기까지 하다니. 그런데 이들은 악인일까요. 영화는 상영시간 전체를 할애해 이야기합니다. 자인의 부모, 나쁜 어른은 악인이 아니라고.







부모들이 저지른 악행을 보여주고, 그 부모들을 고소한 자인. 그리고 카메라는 자인의 행동을 뒤쫓습니다. 자인은 집을 나와 라힐을 만납니다. 그러나 갑자기 라힐이 사라지고 자인은 자신의 힘으로 라힐의 아이 요나스를 돌보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진통제로 불법 쥬스를 만드는 자인. 그리고 자인은 진통제를 향해 기어오는 요나스를 막기 위해 요나스의 발을 가구에 묶습니다. 마치 그의 부모가 아기에게 했던것 처럼 말이죠.  



저는 이장면에서 자리에서 일어날뻔 했습니다.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반전에 소름이 끼쳤죠. 화면이 흐리게 보일만큼 턱일 덜덜 떨렸습니다. 악인이라 생각했던 자인의 부모.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악생이라 생각했던 것을, 자인도 합니다. 


그리고 관객은 알게되죠. 그것이 사실은 악행이면서 악행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개념 너무의 무언가라는 것을.




결국 자인은 요나스를 팔게됩니다. 스웨덴으로 가기 위한 500달러를 벌기위해서였죠. 그러면서 자인은 그편이 요나스에게 더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인이 인간미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자인은 악인이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영화를 보는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심한 두통을 느꼈습니다. 


자인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고 악인이 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요나스는 돈에 팔렸고, 자인은 자신이 증오하던 자신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동생 사하르를 닭 몇 마리에 판 그 아버지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자인의 부모, 사하르의 부모는 딸을 팔기위해 낳았을까요? 고작 닭 몇마리를 받고 팔기위해 아이를 낳기에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들어가는 자원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그 부모도 별 생각없이, 적어도 키워서 팔아야겠다는 이유는 아닌, 그냥 생기니까 낳은 느낌으로 아이를 낳았을 겁니다.



매매혼은 나쁘죠. 고작 11살된 아이를 닭과 바꾸는 것은 악행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서 그걸 행한 사람은 악인일까요. 그리고 그가 악인이라면 요나스를 스웨덴행 표값을 받고 판 자인도 악인일까요? 영화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각 인물들의 자기 변호를 들려주죠. 


그리고 자인의 아버지는 말합니다. 자신은 사하르가 팔려가는 편이 더 행복할꺼라 생각했다고. 게다가 자인의 가족은 월세도 내지 못하며 그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의 아들에게 팔려가는 딸. 아니 아빠의 입장에서는 팔려간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시집가는 거지. 


저는 그것이 진심이라 생각합니다. 저 숨막히는 뒷골목의 자욱한 먼지안에서 숨쉬면 그런 생각이 스멀스멀 진심으로 우러나올것 같습니다.



자인은 또다시 악행을 저지릅니다. 칼로 사람을 찌르죠. 사하르가 그만 죽은 것입니다. 칼을 들고 뛰어나가는 자인을 쫓는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립니다. 이 순간 저는 자인을 용서합니다. 그런 이유로 찔렀다면 자인은 무죄다. 그럴까요?



법리적인 해석은 모르지만, 무죄일까요. 자인의 법정에, 칼에 찔린 사하르의 남편이 나옵니다.(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 저 사람 안죽었네... 그럼 미성년자가 피해자가 죽지도 않았는데 5년형을 받은건가.)



사하르의 남편은 악인일까요? 저는 사하르의 남편이 사하르를 학대하다가 죽였을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사하르는 임신했다가 어린 몸이 견디지 못했고 병원으로 갔으나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하르 남편은 악인일까요? 결혼 후 사하르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하르의 죽음이 전적으로 그 남자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관례처럼 이루어지는 조혼과 성급한 임신, 그리고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병원을 이용하지 못한 구조적인 문제.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한 소녀의 죽음을 그 남자의 등 위에만 올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가버나움의 카메라는 인물들과 한걸음 떨어져 있지만, 시야는 각 인물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화는 이 현실을 벗어날 어떤 방법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영화 중간에도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저 그들이 겪는 고통에서 조금 물러나있을 뿐, 더 멀게 벗어나 그 고통의 시작을 알고 벗어날 방법을 제시할 만큼의 거리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화는 누구도 악인이라 몰아세울 수 없는 곳에서 근원을 찾기 힘든 악행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여주지만, 그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악인은 없습니다. 진흙탕에 살기때문에 더러워지는것이지, 처음부터 흙투성이인 사람은 안나옵니다. 


보통영화라면 주인공이 악당을 응징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세계에서는 누구를 응징해야 할까요. 아이를 묶고 딸을 판 부모? 누가 응징해야 할까요. 요나스를 묶고 요나스를 판 자인? 


영화가 이야기하는 시작없는 절망은 시작이 없었기에 끝도 없습니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간 후에도 이 정말은 끝나지 않을겁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이 무서웠습니다. 두렵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끝낼 수 없는 절망이 스크린에서 넘치다가 결국 제 눈동자에도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마지막을 판타지로 장식합니다. 진짜 가버나움은 영화 끝나기 10분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저, 영화를 보고 찜찜해할 관객들을 위한 배려, 진통제같은 장면이 진행됩니다.


범죄를 저지른 자인은 신분이 생기고 정면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요나스는 자신의 엄마 품으로 돌아갔죠. 게다가 영화에 출현했던 배우들이 냉혹한 현실을 벗어나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후일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극심한 고통 중에 맞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인에게 신분증이 생긴건 전과자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요나스가 엄마의 품에 안긴것은 엄마가 추방당하는 순간이죠. 이제 요나스는 생지옥처럼 묘사된 레바논보다 더 지옥에 가까운 곳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 영화 후기


가버나움은 커피같은 영화입니다. 쓴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것이 취향에 맞아서 입니다.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관객들은, 영화의 진저리처지는 처절함에서 1km정도 벗어난 환경에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마지막 10분 동안 달콤한 설탕 시럽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박에 소금을 뿌리면 단맛이 더 올라오는 것처럼, 진득한 절망에 사카린을 한 스푼 더하니 절망감이 더 극심해 지는 기분. 가버나움은 딱 그런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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